[프라임경제]지구상 유일한 진정한 화가. 자신이 사랑한 작품은 호당 1,000만원에도 팔지 않았던 화백. 김종하 그의 삶이 궁금하다.
김화백은 15세에 조선미술전람회에 작품을 출품 입선한 신동이다. 일제강점기에 15세의 나이로 일본으로 건너가 아르바이트를 하며 일본 가와바다 미술학교를 졸업(33년~36년)했다. 이 정도도 대단하다고 평가 받았지만, 돌아오지 않고 동경제국미술대학을 졸업(36년~39년)했다. 교내전시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그리고 돌아와 1942년 조선미술전람회 특선을 했다.
다른 화가라면 여기서 중단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1956년 다시 프랑스로 가서 프랑스 ACADEMI DE GRANDE CHAUMIERE를 졸업(56년~59년)했다. 그리고 프랑스 등 유럽에서 유렵의 미술을 익히고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였다. 1982년에 프랑스 정부로부터 루벤스훈장을 수훈 (파리 앙데빵당전)한데 이어 파리 보자르드전 금상을 수상하였다.
그리고 고국에 돌아와 2002년 우리 정부로부터 역대 화가 중 최초로 생존 예술가에서 주는 문화훈장을 받았다.
그 어떠한 화가도 살아오지 못한 진정한 예술가의 삶을 15세 때부터 90세가 넘은 지금까지 고승과도 같은 삶을 살아온 사람이다.
따라서 그의 말은 하나 하나가 우리 미술사다. 그는 누구와도 싸우지 않는 사람이다. 1인 시위로 모든 것을 바로 잡는 사람이다.
대표적인 사건은 1962년 국전에서 대학교수들이 받은 돈들을 다 돌려주도록 한 사건이다. 당시 언론은 사설을 통해 올해 작품선정이 최고라고 밝혔다.
김화백은 연재 소설비를 올려주지 않으면 삽화를 주지 않겠다고 1인 시위한 결과 연재소설비까지 올렸다. 뿐만 아니라 국내 최초로 패션쇼를 했다. 모델의 옷을 직접 가봉해 입혀놓고 창작한 사람이다.
후손도 없다. 부인은 2년 전에 돌아가셨으며, 홀로 조용히 자신의 작품을 감상하면서 창작을 하고 있다.
김종하 화백에 대한 기억을 포털아트 김범훈 사장은 이렇게 말한다.
선생님이 어느 날 국립현대미술관을 갔는데 자신의 이름위에 엉뚱한 작품이 있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작품을 박물관에 기증하지 않고, 모든 작품을 태운 후 조용히 삶을 마감하겠다고 말했다.
나는 죄스러움에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그 이후 선생님이 부르면 열일 다 차치하고 찾아뵈었다.
어느 날은 선생님이 스케치를 보여 주셨다. 400여점의 스케치를 보았다. 난 김종하 선생님의 스케치를 보고는 “화가를 왜 천재”라고 하는지 알았다. 감동 먹었다. 위대하다.
사람이 살면서 자신의 삶을 평생 일기장으로 남긴 이도 극소수에 불과하다. 선생님은 평생을 그 때 그 때 영감을 스케치로 남겨 놓은 것이다. 놀랍다. 범인인 나는 욕심이 생겼다.
그 스케치만 책으로 만들어서 우리나라 화가들에게 나누어 주면, 화가 분들에게 더 없는 보배가 되겠다. 그래서 졸랐다. 스케치북을 만들자고 계속 졸랐다. 그리고 그 스케치북의 이름을 <당신이 한국인이면 이 스케치북을 외국인에게 보여 주면 안 됩니다. 이 스케치북은 한국화가를 위한 보배입니다.>로 정했다.
이렇게 위대한 우리의 화가 분을 60세 이하 화가 중 90%가 모른다. 미술품 애호가도 90%나 모른다. 도무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우리는 반성해야 한다. 우리가 우리나라 최고 화가분을 존경하고 모시지 않으면 우리의 자존심과 자긍심, 자부심을 잃는 것이다. 우리가 최고의 화가를 모셔야만 우리가 최고가 된다.
최근에 25년전 김종하 화백에 대한 소개 글을 하나 보았다. 그 당시 끝말이 “이러한 분(김종하 화백)을 모셔야 한국이 세계 미술의 중심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였다.
그러나 그 이후 모두가 김종하 선생님을 잊고 살아 왔다. 그 분이 고승과도 같은 삶, 그리고 비굴함이나 비리에 타협하지 않고 조용히 삶을 사시는 분이기에 누구도 모실 수가 없었다.
나는 포털아트의 모든 것을 걸었다. 내가 선생님을 우리나라 최고로 모시고 세계최고로 모시겠다. 그 어떠한 일이 있어도 알리겠다. 그래야만 25년전 어느 분 말씀과 같이 한국이 세계 미술의 중심이 되고, 우리가 한국인임을 자랑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이번에 전시되는 작품은 선생님께서 70년 이상을 간직해 온 “19세 때 그림 ‘<다리아 꽃>15호” 에서부터, 1956년 프랑스 유학을 떠난 다음 해인 57년에 우리나라 화가로는 처음으로 PARIS LE SALON (GRAND PALAIS)에 출품한 ‘색장갑(50호)’까지 전시한다.
그리고 김종하 화백의 프랑스 유학시절 작품에서부터 김종하 화백이 소장하고 홀로 감상하며 소장하여 온 50년대 작품, 1982년 프랑스 루벤스 훈장을 받을 때 까지 수작들이 전부 전시 판매된다. 또한, 2002년 문화훈장을 수훈 받을 때 까지 국내에서 창작한 모든 작품이 전시된다.
유화 98점, 누드드로잉 72점, 스케치와 에스키스 475점 선생님이 그 오랫동안 감상하여 온 모든 작품이 전시된다.
나는 감히 김종하 화백은 지구상 그 어떠한 화가도 살아오지 못한 진정한 예술가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존경하고 우리가 모셔야 할 위대한 화가이자. 우리가 한국인임을 자랑스럽게 하여 줄 화가라고 생각한다.
여러분도 김종하 화백의 전시에 와서 그 분이 평생 아껴온 작품들을 보면 나와 같은 생각을 할 것이다.
[글옮김] 이런분(김종하)을 모셔야 한국이 세계 미술의 중심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엠파스블로그 "다시쓰는 그사람 그얘기" 란 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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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서 5년 고행(苦行)한 김종하(金鍾夏)
손으로 한쪽 귀를 막고 노래를 한다. 아주 미성(美聲)의 테너다. 소리 지르지 않고 다정하게 연인에게 속삭이듯 부드럽고 가늘게 내뽑는 소리가 멀리까지 조용히 들린다. 손바닥으로 한쪽 귀를 막는 것은 자신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다. 목청에서 나는 소리가 두성(頭聲)이 되어 안으로부터 울리면서 고막에 전달된다. 그래서 자신의 음색을 가늠하는 것이다.
매사에 그스로를 그렇게 진맥하듯 짚어보고 컨트럴하는 겸손한 자제력을 지닌 사람--- . 김종하(金鍾夏) 화백의 경우다. 그의 나이 어언 65가 되었지만 그 옛날 한낮에 덕수궁에 들어가도 인적이 뜸하던 시절 나무그늘에 앉아 곧잘 귀를 막고 노래를 하곤 했다.
자그마한 몸집이지만 멋이 자르르 흘렀고 언제난 조심스런 행동에 사근사근 정겨운 말씨의 그가 5년만에 파리에서 돌아왔다. "나 기억하겠어. 너무 오랫만이라..." 전화에서 불쑥 들린 목소리지만 금방 김화백임을 알수 있었다. 1주일 전에 귀국했다는 그는 "쉬려고 왔다"고 했다.
좀더 온화한 노신사로 변했고 전에 없던 콧수염이 애교스러웠다. 5년 동안 무척 고생한 보람있어 지난 해에 13곳 전람회에서 요청받아 작품을 냈고, 11월에는 파리 한국문화원서 개인전을 열었는데 전시작품 34점 가운데 무려 24점이 팔렸다.
"나도 예상 못했던 일이야. 2호나 3호짜지 몇 점 팔리면 재료값이나 건지겠지 해서 그것만 액자를 잘 끼웠고 큰 그림은 그대로 내놨었지." 그런데 50호, 30호, 25호 등 큰 그림만 팔렸다. 모두 프랑스사람이나 그곳 거주 외국인이 샀는데 한점 한점 액자를 끼워서 전달하기에도 애를 먹었다고.
그들은 꼭 저녁초대를 하고 그림을 가져가면 그림을 거는 위치가 이곳이 좋을 것 같은데 마음에 드는가고 물었다. 그렇게 하루 한집씩 저녁초대를 받고 그림을 전달하지니 정중한 대접을 받는 것도 고역이었다. 그는 56년에도 파리에 가 한 3년 머물었는데 그때 사귄 이들이나 그들의 가족 친지들이 대거 몰려와 그림을 샀다.
엽서만한 것 한점만 팔려도 환성을 지르는 파리에서 기적이 일어났다고 했다. 그곳 화가들이 경탄해마지 않으며 김화백이 부자가 됐다고 화랑가에 소문이 났다.
그덕에 그동안 충분히 작업하고 귀국할 수 있는 비용까지 남아 한 1년 고국에서 쉬려고 왔는데 놀랍게도 150점의 그림과 데상 1백점을 가지고 왔다.
그가 초청되었던 화랑은 '앙데팡당', '살롱 드똔느', '살옹 데보자르' 등 80~1백년의 전통있는 곳들인데 이곳에 초대되는 작가도 나이 60이 넘은 사람들. 60은 넘어야 작업연륜이 40년 되며 그만큼 한 사람이 아니면 안정권에 들지도 못한다는 것이다. 연륜이 짧은 화가는 "더 두고 보자"는 식이다.
그는 내년 파리 '산토노레'의 1급 화랑과 개인전 약속이 되어 있다. 전세계에서 몰린 수십만 화가 가운데 40명정도가 이 화랑과 계약이 되어 3년에 한번씩 돌아가며 개인전을 열 수 있는 곳이다.
"고생 많이 했다", "무섭게 작품활동했다"는 노화가는 자리잡기 힘든 곳에서 5년만에 "이제 자리잡혀 간다"며 내년에 돌아가 5년만 더 눌러있으면 "자신있다"고 했다.
술, 담배도 끊고 신사복을 한번도 입어 볼 겨를이 없었다는 그는 언제나 손을 귀에 대고 노래하듯 스스로의 소리를 듣고 스스로를 살펴 가늠하며 다져가는 화가다.
그분의 작품은 언제나 후배 작가들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그분이 그린 그림들은 한국 미술의 역사가 된 작품이고 그분이 또 이번에 선보일 그림들은 한국 미술의 역사가 될 작품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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