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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인 칼럼] 시월의 대구와 오월의 광주 그리고 매국노(들)

 

이종엽 발행인 | lee@newsprime.co.kr | 2026.10.08 09:07:27
[프라임경제] 국정의 혼란과 정책 실패로 삶이 무너진 시민들이 거리로 나왔다. 처음에는 몇몇이었지만, 이내 수천 수만 명이 같은 요구를 외치기 시작했다. 권력은 대화보다 진압을 택했고, 급기야 총성이 울렸다. 

사람들은 눈앞에서 쓰러지는 이들을 목격했고, 일부 시민들은 경찰서를 습격해 무기를 탈취했다. 곳곳에서 총격전이 벌어졌고, 누군가는 총을 든 이들에게 음식과 물을 건넸다.

당국은 즉각 계엄령을 선포하고 장갑차와 기관총을 앞세워 진압에 나섰다. 항쟁은 주변 지역으로 번졌고, 200만명의 사람들이 격동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공식 기록에는 170여 명의 사망자라고 말하지만, 당시의 혼란과 이후 이어진 보복과 탄압까지 감안하면 실제 희생의 규모는 더욱 클 것이다.

사건 가담자로 지목된 이들 가운데 일부는 정식 재판조차 거치지 못한 채 처형됐고, 이후 민족 비극의 혼란 속에서 또다시 많은 이들이 희생됐다.

여기까지만 읽으면 적지 않은 사람들은 1980년 5월의 광주를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이 비극적인 사실은 '광주민주화운동'이 아니다.

올해로 정확히 80년 전, 1946년 대구에서 시작된 ‘10월 항쟁’이다. 해방 직후 미군정 아래에서 각종 정책은 연이어 실패했고 쌀값은 폭등했으며 식량난은 극심했다. 급기야 친일경찰 재임용, 콜레라 창궐, 살인적인 미곡 징발과 제한 배급 정책 이후 농민과 도시 노동자들의 삶은 더욱 벼랑 끝으로 내몰렸다. 

미군정은 일제강점기에도 쉽사리 손대지 않았던 여름 보리까지 강제 징발했고 결국 시민들은 총파업과 시위로 맞섰다. 1946년 10월 1일 경찰의 발포로 시민이 사망하면서 분노는 폭발했고, 대구에서 시작된 항쟁은 삽시간 여러 지역으로 번져나갔다.

대구 '10월 항쟁'에는 미군정기라는 혼란한 상황에서 소위 좌익 세력과 정치적 조직도 개입했다. 하지만 폭력과 무장 충돌이 이어질 때 그렇게 많은 평범한 시민이 왜 거리로 나왔는지 묻지 않은 채 사건 전체를 ‘좌익 폭동’ 한마디로 규정해버리는 것은 역사라기보다 정치에 가깝다.

1946년 10월 1일 대구시위 발포 현장 사진.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소에서 공개한 사진으로 거리 한쪽에 장총으로 무장한 경찰들이 엄폐물 뒤에 쪼그려 앉아있고 반대편으로 피신한 시위군중 쪽에는 여러 명이 땅바닥에 쓰러져 있다. ⓒ 진실화해위원회

더 큰 문제는 그 이후였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10월 항쟁'은 오랫동안 금기의 역사가 됐다. 사건의 발생지인 대구에서조차 이 이야기를 입 밖에 내는 사람은 드물었으며, 오히려 아는 이를 찾기 어려울 정도다.

필자의 고향은 대구 동인동이다. 지금도 시청과 시의회가 자리한 대구의 중심이다. 어린 시절부터 그곳에서 많은 어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지만, 이상하게도 1946년 10월에 관한 이야기는 들은 기억이 없다. 물론 필자가 과문한 탓일 수도 있다.

말하지 않았던 것인지, 말할 수 없었던 것인지, 아니면 이미 잊혀진 것인지 알 수 없다. 역사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거짓말이 아니라 '망각'이다. 거짓은 언젠가 반박이라도 할 수 있지만 기억 자체가 사라지면 질문할 사람 조차 없어지기 때문이다.

34년 뒤 광주에서 다시 총성이 울렸다. 1980년 광주와 1946년 대구는 같은 사건이 아니다. 시대도 다르고 정치적 배경도 다르며, 사건을 이끈 세력과 역사적 평가 역시 동일하지 않다. 그러나 두 사건이 우리에게 남긴 질문은 놀라울 만큼 닮아 있다.

국가는 시민의 절규를 외면할 때 어디까지 폭력적일 수 있는가. 권력이 국민을 적으로 규정하는 순간 어떤 비극이 시작되는가. 그리고 비극이 끝난 뒤 우리는 그 희생을 어떻게 기억해야 하는가.

21세기가 시작된 지도 사반세기가 지났다. 대한민국은 세계가 놀랄 만큼 성장했고 민주주의도 제도적으로 정착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역사를 바라보는 우리의 태도만큼은 여전히 과거의 진영 논리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여전히 '역사 전쟁' 중이다.

내가 지지하는 세력의 폭력에는 ‘시대적 상황’을 말하면서 다른 지역의 희생에는 냉소하고 자신의 부모와 조부모가 겪은 아픔에는 눈물을 흘리면서 타인의 가족이 겪은 죽음에는 먼저 '좌우의 이름표'부터 붙인다.

역사의 희생자 앞에서 먼저 물어야 할 것은 그 사람이 어느 편이었느냐가 아니다. 왜 죽어야 했는지, 국가는 무엇을 잘못했는지 그리고 다시는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으려면 무엇을 고쳐야 하는지를 묻는 것이 먼저다.

대구 사람이라면 1946년 10월의 아픔을 알아야 하고, 광주 사람이 아니어도 1980년 5월 앞에서 숙연할 줄 알아야 한다. 

제주 사람이 아니더라도 4·3의 희생을 기억해야 하고, 여순의 후손이 아니더라도 그 죽음 앞에서 고개를 숙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사회 공동체 구성원의 역할이고 책임이다.

오늘도 누군가는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고 애국을 말한다. 그러나 애국은 깃발을 얼마나 크게 흔드느냐로 증명되지 않는다. 국가가 저지른 잘못까지 바라보고, 그 국가로부터 희생당한 사람의 고통까지 자신의 역사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 비로소 애국이라는 말도 의미를 갖는다.

오히려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역사의 일부만 골라 기억하고, 다른 지역의 희생을 조롱하며, 타인의 아픔을 이념으로 재단하면서도 스스로를 애국자라 부르는 사람들이 있다면 우리는 그들에게 다른 이름을 붙여야 할지도 모른다.

나라를 파는 행위가 반드시 영토를 넘기고 국권을 넘기는 것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공동체의 기억을 팔고, 국민의 죽음을 팔고, 타인의 상처를 팔아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얻는 행위 역시 결국 이 나라를 무너뜨리는 매국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가 경계해야 할 ‘매국’은 과거형만이 아닐지도 모른다. 

죽은 이들에게까지 좌우의 완장을 채우고, 자신에게 유리한 역사만 기억하며, 다른 지역의 희생을 조롱하는 사람들.

국가의 이름을 앞세우면서 정작 국민의 고통에는 무관심한 사람들.

태극기를 흔들면서도 같은 태극기 아래 살았던 국민의 죽음을 정치적으로 차별하는 사람들.

누가 진짜 이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이고, 누가 이 나라를 갉아먹는 사람인지는 어쩌면 그 지점에서 구분되는지도 모른다.

대구의 10월을 기억하면서 광주의 5월을 외면하지 않고, 광주의 5월을 기억하면서 대구의 10월을 지우지 않는 것. 그렇게 제주와 여순, 그리고 이름조차 남지 않은 수 많은 희생까지 우리의 역사로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야말로 대한민국을 지키는 최소한의 태도다. 역사를 자신에게 유리한 만큼만 기억하는 사람은 국가와 국민 그리고 헌법을 말할 자격이 없다. 역사의 일부만 잘라 증오를 팔고, 오래된 상처를 다시 헤집어 오늘의 정치적 이익으로 바꾸는 일은 신념도 애국도 아니다. 그저 '비겁함'일 뿐이다.

사람들은 역사를 ‘승자의 기록’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과거 전제군주시대에는 타당하지만 민주공화정시대에는 맞지 않는다. 어쩌면 그보다 더 정확한 표현은 따로 있을지 모른다.

"역사는 외면하지 않는 자의 편이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수 많은 죽음과 희생, 눈물과 침묵 위에 서 있다. 그 희생을 다시 진영과 지역, 이념의 잣대로 나누지 않는 것. 그리고 누구의 죽음이든 우리의 역사로 받아들이는 것. 그것은 거창한 애국도, 특별한 용기도 아니다.

언젠가 후대가 오늘의 우리를 돌아보는 날, 부끄럽지 않기 위해 반드시 지켜야 할 한 사회의 최소한의 '양심이자 품격'이다.

이종엽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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