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품이 재태크 수단으로 급부상하면서 미술품 애호가나 투자자들 사이에서 북한 미술이 각광받고 있다. 이미 인터넷 경매사이트인 포털아트(www.porart.com) 등에서 월간 1000여점 이상 판매될 정도. 북한 미술품은 더 이상 ‘그림의 떡’이 아니다. 생활 깊숙이 파고 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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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촌풍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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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일부 화가의 작품은 경매 시작과 동시에 즉시 구매가에 낙찰될 정도라고. 매니아층이 형성되고 그 수가 늘어나고 있다니 두말할 나위가 없다.
새로운 문화 아이콘으로 부각하고 있는 북한화가를 만나본다.<편집자주>
동우(東愚) 김관호(1890~1959) 화백. 작품은 물론 미술가로서 걸어온 길만으로도 관심을 끄는 사람의 하나다.
국내 최초로 누드화를 그린 김화백은 당시 사회분위기가 그의 천재성을 쫓아가지 못해 일찍이 미술계에서 묻혀질 수밖에 없었던 비운의 화가다. 한 마디로 사회적 이해의 부재 속에서 천재성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던 사람이다.
1890년 평양에서 출생한 김화백은 1909년 20세에 일본으로 건너가 1911년 도쿄미술학교에 입학했으며 1915년 수석으로 졸업했다
김화백이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1916년 일본 문부성에서 주최한 제 10회 전람회 문전(文展)에서 누드화 <해질녘>이 최고상 격인 특선으로 입선하면서부터다. 도쿄미술대학에 소장되어 있는 이 작품은 목욕을 마치고 대동강변에 서 있는 두 명의 여인을 주제로 한 작품으로, 사실적인 묘사로 인해 현재까지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국내에 유화가 보급된 이후로 최초로 1916년 평양에서 유화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한국 최초 문예동인지인 <창조>에서도 활동하기도 했던 김 화백은 1923년 제 2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작품 ‘호수’로 입선했다. 1924년에는 평양에 미술단체(塑星會)와 연구소를 개설, 김찬영 등과 함께 서양화 보급에 힘썼다.1954년에는 조선미술가동맹에 들어가 모란봉, 해방탑의 여름, 대타령채전 등의 유화를 남겼다.
한국 근대 유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미술사적 평가를 받고 있는 김관호 화백. 그의 작품은 19세기 프랑스 화가 피에르 퓌비 드 샤반느의 영향을 받아 밝고 세련된 인상주의적 색채가 짙다는 평가다.
분단 이후 북에 남았기 때문에 삶이 불분명해 한국근대미술사에서 증발해버린 불운했던 미술가였던 김화백은 북으로 간 화가들의 활동상과 작품들이 공개된 1980년대 이후에도 오래도록 잊혀진 이름이 되었다. 남에서는 그 흔적을 찾을 길 없어 한 때의 천재화가로 기억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