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임경제] 현대자동차그룹이 미래 모빌리티 전환의 초점을 공급망 전반으로 넓히고 있다.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 이하 AI)과 로봇, 소프트웨어 중심 자동차(Software Defined Vehicle, 이하 SDV)로 산업의 축이 이동하면서 협력사의 자금 회전, 기술 전환, 인력 역량이 완성차 경쟁력의 일부가 되고 있다.
미래차 경쟁은 완성차 업체의 개발 속도에서 끝나지 않는다. 전동화 부품을 만들 협력사, 소프트웨어를 이해하는 현장 인력, 납품대금을 안정적으로 회수할 수 있는 금융 구조가 함께 맞물려야 한다. 협력사의 전환 속도가 늦어지면 완성차의 전환 속도도 흔들릴 수밖에 없다.
현대차그룹이 공정거래위원회(이하 공정위), 1·2차 협력사와 함께 상생협약을 체결한 이유다. 상생이라는 표현은 익숙하지만, 이번 협약의 핵심은 미래 산업 전환 과정에서 공급망의 병목을 줄이는 데 있다.
현대차그룹은 지난 7일 경기도 성남시 판교 더블트리 호텔에서 '현대자동차그룹 상생협약 체결식'을 열고 공정위, 1·2차 협력사들과 미래 모빌리티 생태계 협력 기반을 다지는 협약을 맺었다.
협약식에는 주병기 공정거래위원장과 공정위 관계자, 서강현 현대차그룹 기획조정담당 사장 등 그룹 주요 임직원이 참석했다. 현대차·기아를 비롯해 현대모비스, 현대제철, 현대건설, 현대로템, 현대엔지니어링, 현대트랜시스, 현대위아, 현대오토에버, 현대케피코, 이노션 등 12개 계열사 대표와 150여개 1·2차 협력사 관계자도 자리했다.
◆미래차 전환, 공급망 속도와 직결
자동차 산업은 전동화 이후 또 한 번의 변곡점을 지나고 있다. 차량은 기계적 완성도에 더해 소프트웨어 업데이트, 데이터 처리, 사이버보안, AI 기반 제어 역량까지 요구받고 있다. 생산 현장에서는 로봇과 스마트 팩토리 활용도가 높아지고, 자율주행과 미래 항공 모빌리티(Advanced Air Mobility, 이하 AAM), 수소 에너지까지 그룹의 사업 반경도 넓어지고 있다.
이 변화는 완성차 업체 안에서만 처리될 수 없다. 부품을 납품하는 협력사도 개발 방식과 인력 구조를 바꿔야 한다. 과거에는 품질과 납기, 원가 경쟁력이 핵심이었다면 앞으로는 소프트웨어 대응력과 데이터 이해도, 친환경 규제 대응 능력까지 경쟁력의 범위에 들어간다.
현대차그룹 입장에서도 협력사의 전환은 선택지가 아니다. 공급망 어느 한쪽에서 자금난이나 기술 공백이 생기면 미래차 개발과 생산 일정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협력사를 거래 상대가 아니라 전환 파트너로 묶어야 하는 이유다.
주병기 위원장은 축사를 통해 "미래 모빌리티 산업의 혁신은 협력사와의 건강한 협업 구조와 상생 위에서 더욱 단단하게 지속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현대차그룹의 상생협력 확대를 두고 "우리 경제가 선진 경제 시스템으로 전환하는 출발점"이라고 평가했다.
또 서강현 사장은 "협력사의 경쟁력이 곧 현대차그룹의 경쟁력이고, 공급망 전체가 건강해야 우리 모두가 글로벌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협력사들이 전동화와 자율주행, 로봇, 소프트웨어 중심의 미래 모빌리티 전환 과정에서 뒤처지지 않도록 그룹 차원의 역량을 모으겠다고 강조했다.
◆대금 지급 단축, 전환 투자 위한 숨통
현대차그룹은 협력사 경영 안정의 출발점으로 대금 지급조건 개선을 꺼냈다. 협력사에 대한 대금을 법정 지급기한인 60일보다 짧은 평균 10일 이내에 지급해 자금 운용 부담을 줄이겠다는 구상이다.
미래차 전환기 협력사에 가장 큰 부담은 투자다. 설비를 바꾸고, 인력을 교육하고, 새로운 품질 기준에 맞추려면 현금 흐름이 뒷받침돼야 한다. 납품대금 회수가 늦어질수록 협력사의 투자 여력은 줄어든다. 결국 결제 조건 개선은 복지성 지원보다 산업 전환을 위한 기초 체력 보강 성격이 크다.
현대차그룹은 1차 협력사가 2차 협력사에 지급하는 대금의 지급기일도 단축될 수 있도록 교육과 모니터링, 인센티브를 병행한다. 완성차와 1차 협력사 사이에서만 자금 흐름이 개선될 경우 2·3차 협력사는 체감 효과를 얻기 어렵다. 이번 협약이 공급망 아래 단계까지 결제 관행을 넓히려는 이유다.
상생결제시스템 활용도도 높인다. 이 제도는 최상위 구매기업의 신용을 바탕으로 1·2·3차 협력사가 납품대금을 조기에 현금화할 수 있도록 돕는 결제체계다. 2·3차 협력사는 대기업 수준의 금리로 자금을 조달할 수 있어 금융비용 부담을 줄일 수 있다.
현대차그룹은 1차 협력사의 상생결제시스템 활용 실적을 평가와 인센티브에 반영해 제도 확산을 유도한다. 공정위는 협약 이행 기업에 인센티브를 제공하고, 대금 지급조건 개선 과정에서 나오는 협력사의 애로사항을 청취하기로 했다.
◆기술·교육·금융 지원, 협력사 역할 재정의
이번 협약의 또 다른 축은 기술과 교육 지원이다. 현대차·기아는 협력사가 SDV와 전동화, 자율주행 개발 환경을 따라갈 수 있도록 기술 전환을 지원한다. AI와 소프트웨어, 환경·사회·지배구조(Environmental, Social and Governance, 이하 ESG), 탄소중립, 사이버보안 교육도 운영한다.
이 대목은 현대차그룹의 협력사 정책이 과거의 납품 안정 중심에서 미래 산업 역량 강화로 옮겨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자동차가 소프트웨어와 연결되는 속도가 빨라질수록 협력사도 기존 제조 역량만으로는 경쟁력을 유지하기 어렵다. 부품을 잘 만드는 회사에서 데이터를 이해하고 보안 기준을 맞추는 회사로 역할이 확장되고 있다.
계열사별 지원도 미래 사업 방향에 맞춰 배치됐다. 현대모비스는 로봇 사업 확대와 맞물려 첨단 부품 기술 협력사 육성에 나선다. 현대로템은 기술 인재 역량 개발을 지원하고, 현대오토에버는 AI 교육과 자격증 취득 지원, 협력사 소프트웨어 역량 강화를 맡는다.
현대위아는 협력사의 수출입 인증을 지원해 글로벌 사업 기반을 넓히고, 현대케피코는 무상 특허 제공과 청년 인력 채용 지원, 동반성장펀드 금리 개선을 추진한다. 현대제철은 동반성장펀드와 납품단가 연동제 교육을 통해 협력사의 금융 부담과 제도 대응을 돕는다.
건설·광고 계열사의 지원도 협약 안에 포함됐다. 현대건설은 우수 현장소장 포상제와 안전 인센티브 제도를 확대하고, 현대엔지니어링은 법정 기준을 웃도는 안전관리비 편성으로 현장 안전 기반을 강화한다. 이노션은 협력사 임직원의 AI 구독료를 지원하고, 기술자료임치제를 운영해 지식재산권 보호를 돕는다. 입찰에서 탈락한 협력사에도 시안 대가를 지급해 업종 특성에 맞춘 거래 관행 개선을 추진한다.
◆상생협약 뒤에 놓인 생존 전략
현대차그룹의 이번 협약은 공정거래와 동반성장이라는 익숙한 틀 안에 있지만, 산업적으로는 더 현실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 미래차 전환은 완성차 업체 혼자 빨리 달린다고 완성되는 경주가 아니다. 공급망이 같은 속도로 따라오지 못하면 기술 전환은 생산 차질과 품질 리스크, 비용 부담으로 되돌아올 수 있다.
특히 AI와 SDV, 로봇 중심 전환은 협력사 간 격차를 키울 가능성이 크다. 자금과 인력을 갖춘 협력사는 새로운 기회를 잡을 수 있지만, 중소 협력사는 투자 시기를 놓칠 경우 기존 거래 구조 안에서도 입지가 약해질 수 있다. 현대차그룹이 대금 지급, 금융, 교육, 기술 지원을 한꺼번에 꺼낸 것도 전환 격차를 줄이려는 성격이 짙다.
관건은 협약 이후의 실행력이다. 평균 10일 이내 대금 지급과 상생결제시스템 확산이 2·3차 협력사까지 얼마나 체감될지, AI와 SDV 교육이 실제 개발 역량으로 이어질지에 따라 이번 협약의 온도는 달라질 수 있다.
현대차그룹 관계자는 "협력사 경쟁력 제고를 추진해 공급망 전반의 기술 수준을 높이고, 미래 산업 생태계도 협력사와 함께 키워 나갈 계획이다"라며 "공급망 전반에 공정하고 지속가능한 상생협력 문화가 확산될 수 있도록 실질적인 지원을 이어가겠다"고 말했다.
현대차그룹의 미래차 전략은 신차와 기술 발표에만 있지 않다. 협력사의 현금 흐름을 당기고, 교육과 기술 지원을 넓히며, 2·3차 협력사까지 전환의 범위 안으로 끌어들이는 작업도 같은 전략의 일부다. 미래 모빌리티 경쟁이 빨라질수록 완성차의 다음 경쟁력은 공급망을 얼마나 같은 속도로 움직이게 하느냐에서 갈릴 가능성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