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라임경제] 주택담보대출 2억8000만원, 마이너스통장 2300만원. 월요일 아침 박 과장의 은행 앱에 표시된 대출 잔액이 모두 '0원'으로 바뀌었다. 전국 금융망을 뒤흔든 AI 해커들의 선언은 짧았다.
"당신의 미래를 돌려드립니다."
만약 가상의 해커 조직에 의해 대한민국 가계대출이 하루아침에 사라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 궁금증을 가상의 직장인 박 과장을 통해 따라가 봤다. 대출 채무는 최종 소멸하고 예금과 주택 소유권은 남는다는 설정이다. 기업·사업자대출과 전세보증금 반환 의무 등은 제외했다. 현실에서는 전산 기록이 삭제됐다는 이유만으로 법적 채무가 없어지지 않는다.
◆ 아들이 환호할 때 어머니는 은행으로 뛰어갔다
대출이 사라졌다고 박 과장 통장에 3억300만원이 들어온 것은 아니다. 집값이 그대로라면 순자산이 그만큼 늘고, 앞으로 낼 원리금이 줄어든다. 당장 손에 남는 것은 월 170만원. 미뤘던 아이 치과 진료를 예약하고 비상금을 모을 여유가 생겼다.
문제는 박 과장이 갚을 돈이 은행에는 받을 돈이었다는 데 있다. 대출채권은 은행의 자산이다. 이것을 지워도 고객에게 예금을 돌려줄 의무는 남는다.
일례로 자산 100, 부채 90, 자기자본 10인 은행이 있다 치자. 다른 조건을 빼고 대출자산 30이 사라지면 자산은 70으로 줄지만 갚아야 할 돈은 여전히 90이다. 자기자본을 모두 잃고도 20이 부족하다.
예금이 함께 삭제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은행이 돌려줄 능력을 의심받으면 사정이 달라진다. 불안해진 고객들이 한꺼번에 돈을 찾는 뱅크런이 벌어질 수 있다.
중앙은행이 긴급 자금을 공급하면 당장 인출할 돈은 마련할 수 있다. 그렇다고 없어진 대출자산이 돌아오지는 않는다. 현금을 빌려주는 조치와 손실로 깎인 자본을 메우는 조치가 함께 필요한 이유다.
◆ 내 통장에 돈이 남자, 회사 돈줄이 말랐다
박 과장은 가족과 외식을 하고 미뤘던 아이 치과 진료를 예약했다. 빚 갚느라 줄였던 지출이 풀리면 식당과 병원, 상점의 매출도 늘어날 여지가 있다. 가계부채가 소비를 짓누르던 무게를 덜어내는 효과다.
하지만 다음 날 회사에는 비상경영 메일이 돌았다. 운영자금 대출의 만기 연장이 지연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가계대출에서 큰 손실을 본 은행은 기업대출에도 몸을 사리게 된다. 만기 연장이 막히면 물건을 잘 팔던 회사도 결제할 돈이 부족해질 수 있다. 자금난이 길어지면 투자와 고용을 줄인다.
박 과장에게 쓸 돈이 생겼지만, 역설적으로 이들에게 월급을 주는 회사는 버틸 돈을 구해야 했다. 은행 손실이 기업의 자금난을 거쳐 다시 가계의 소득을 위협하는 경로다. 정부가 결제와 기업 금융을 얼마나 빨리 안정시키느냐가 소비 회복의 지속 여부를 가른다.
◆ 먼저 빚 갚은 누군가는 불행해졌다
사내 메신저에는 대출이 사라졌다는 인증이 올라왔다. 생활비 대출 500만원이 없어진 막내도, 주택 관련 대출 수억원이 사라진 임원도 있었지만 김 대리는 말이 없었다. 지난주 적금까지 깨서 대출을 모두 갚았던 그에게 돌아온 탕감액은 0원이었다.
해커들은 절박한 순서대로 탕감액을 나눠주지 않았다. 탕감액은 사건 당시 남아 있던 빚의 크기만으로 정해졌다. 빚이 없던 사람과 먼저 갚은 사람은 직접적인 혜택에서 빠졌다.
주택시장에서도 처지가 갈렸다. 박 과장은 원리금에 쫓겨 집을 급히 팔 이유가 없어졌다. 반면 집을 사려던 후배는 은행 문턱을 넘지 못했다. 신규 주택담보대출을 받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급매가 줄면 집값을 받치는 힘이 생기지만 대출이 막히면 매수자의 구매력이 약해진다. 가격의 방향을 단정하기는 어려울지라도 거래가 막힐 조건은 갖춰진 셈이다. 기존 차주의 빚을 없앤 일이 새로 집을 사려는 사람의 사다리를 걷어찰 수 있다.
◆ 은행을 살린다면 어디까지 살리나
금융기관을 재건하려면 손실을 나눠야 한다. 기존 주주의 지분 가치를 깎고 채권자에게도 부담시킬지, 정부가 돈을 넣고 은행 지분을 확보할지 결정해야 한다.
예금과 결제망을 지키는 데 동의한다고 기존 투자자까지 모두 보호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구제 범위를 넓힐수록 공공부문이 떠안을 부담도 커질 수 있다.
공적자금이 전부 세금으로 사라지는 돈은 아니다. 정부가 확보한 지분을 나중에 매각해 회수할 수도 있다. 반대로 당장 돈을 쓰지 않은 보증이 뒤늦게 재정 손실로 돌아오기도 한다.
국채를 발행할지, 세금을 더 걷을지, 다른 지출을 줄일지도 남는다. 박 과장의 빚이 사라졌다는 사실만으로 최종 청구서의 주인을 알 수는 없다. 그 주인을 정하는 과정에서 정치적 갈등이 벌어진다.
가계가 얻은 여유는 실제 생활을 바꾼다. 동시에 사라진 채권의 손실도 누군가의 장부에 남는다. 금융 재건이 늦어져 일자리가 흔들리거나, 비용을 넓게 국민에게 넘기면 채무자가 얻은 이익도 줄어든다.
매달 통장을 스쳐 가던 170만원. 박 과장은 마침내 그 굴레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어머니의 예금도, 내일의 월급봉투도 저절로 안전해진 것은 아니었다.
내 통장의 대출이 감쪽같이 사라진 다음 날 아침, 우리는 정말 마음 놓고 웃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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